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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성 204표, 반대 85표. 윤석열 대통령 탄핵안이 가결된 12월14일, 서울 여의도 일대가 응원봉 물결로 출렁였다. 비상식적인 비상계엄 선포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낸 국민 연대의 힘이었다. 이제 공은 헌법재판소로 넘어갔다. '광장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탄핵안 가결로 정국 불확실성은 줄어들었지만, 시민들은 윤 대통령 파면의 최종 확정을 촉구하며 헌재가 있는 안국역을 중심으로 촛불시위를 이어가고 있다. 여러 정치적 변수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비상계엄 파장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영화계도 상황을 예의주시하는 분위기다.
탄핵 사태로 '연말 특수'가 실종됐다는 진단이 여기저기서 나오는 중이다. 극장가 역시 비상계엄 여파로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고사장 분위기가 한없이 가라앉았다. 정치가 영화의 상상력을 압도하고, 의회가 스크린보다 더 극적이니, 극장가로서는 타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송강호·박정민의 《1승》, 김윤석·이승기의 《대가족》,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모아나2》 등이 연말 극장가를 노리며 개봉했지만, 탄핵이라는 암초를 만나면서 신작 개봉 효과를 보지 못했다. 작품 자체가 계엄이라는 이름 에이앤피 아래 묻혔다. 예매 취소도 잇따랐다.



영화 《서울의 봄》 스틸컷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제공


개봉 연기·불매운동 등 '홍역'
개봉을 미룬 영화도 있었다. 12월24일 개봉 예정이던 《괜찮아 괜찮아 서브프라임결과 괜찮아!》다.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관객들과 만나기 위해 부득이하게 개봉을 연기하게 됐다"는 게 배급사의 설명. 혼란스러운 정국을 피해 무기한 개봉 연기라는 초강수를 꺼낸 것이다.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아!"를 외치고 싶은 심정인 것으로 보인다.
흥행 1위를 달리던 《소방관》도 복병을 만났다. 불매운동이란 복병이었다. 부산수협 영화를 연출한 곽경택 감독의 친동생인 곽규택 국민의힘 의원이 12월7일 윤 대통령 탄핵소추안 표결에 불참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타깃이 된 것이다. 《소방관》은 주연배우 곽도원의 음주운전으로 개봉이 밀린 영화였다. 그리고 또 코로나 여파로 늦춰졌다. 어렵사리 관객을 만났는데, 자다가 봉창 두드리듯 돌발 변수를 맞이했다. 이를 바라보는 곽경택 감독의 마음은 대학생 대출 더없이 무거웠을 것이다.
곽 감독은 결국 12월12일 기자들에게 "곽경택 감독입니다"라는 이메일을 보냈다. "저의 가족 구성원 중 막내인 곽규택 국민의힘 의원이 당론에 따라 탄핵 투표에 불참한 것으로 인해 영화 《소방관》까지 비난의 대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 저 또한 단체로 투표조차 참여하지 않은 국회의원들에게 크게 실망하고 분노했다"고 적은 글에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모든 영화가 타격을 받은 건 아니다. 오히려 '탄핵 특수'를 맞은 영화가 있다. 김건희 여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퍼스트 레이디》다. 학력 위조와 논문 표절, 고가의 디올백 수수, 양평고속도로 노선 변경,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의혹 등 김건희 여사를 둘러싼 의혹들이 담겼다. '서울의 소리'가 제작한 《퍼스트 레이디》는 당초 올해 상반기 개봉을 예정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당시엔 개봉이 무산됐다. 틀어주겠다고 선뜻 나서는 극장이 없어서다. 정권의 눈치를 본 극장이 없진 않았을 것이라는 게 영화 측 입장이다.
12월12일로 다시 개봉일을 잡고 VIP 시사회를 진행했을 때도 《퍼스트 레이디》가 놓인 외부적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그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탄핵 정국이 다큐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리는 부스터 역할을 했다. 개봉 첫 주 누적 관객 수 3만 명. 전국 37개 상영관밖에 확보하지 못했음을 감안할 때, 엄청난 관객 수다. 개봉 첫날 박스오피스 8위로 시작한 영화는 12월14일 대통령 탄핵안 가결 이후 5위로 순위도 상승했다. 홍보사는 발 빠르게 "탄핵 가결과 함께 관객 수 급증"이라는 홍보 보도자료를 냈다. 스크린 수 확대가 얼마나 이어질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탄핵 변수는 OTT 시장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극장가 신작 영화들에 영향을 미쳤듯, OTT 신작들에도 악재로 작용했다. 디즈니플러스가 《무빙》의 강풀 작가와 다시 손잡고 12월4일 내놓은 《조명가게》의 경우 탄핵의 여진을 고스란히 받았다. 시청자가 많이 봐야, 호평이든 혹평이든 어떤 소문이 날 텐데, 그런 분위기가 쉽게 감지되지 않았다. 《조명가게》로서는 타이밍이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래도 상영관이 줄어들면 손쓸 방법이 없는 극장 영화보다는 상황이 나쁘지 않다. 12월18일 마지막 회가 공개되는 만큼, 뒤늦게 탑승한 시청자들의 전 회차 정주행을 기대해볼 만하다.



영화 《택시운전사》 스틸컷 ⓒ㈜쇼박스 제공


OTT에선 민주주의 다룬 영화들 인기
탄핵 정국으로 인해 OTT에 나타난 또 하나의 두드러진 변화는 민주주의 현대사를 담은 영화들의 역주행이었다. 가장 많이 거론된 작품은 지난해 말 개봉해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서울의 봄》이다. 12월3일 밤 갑작스럽게 이뤄진 윤석열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이후 영화 《서울의 봄》 IPTV 이용량은 1000% 급증한 것으로 조사됐다. 넷플릭스에서도 역주행하며 12월6일부터 10일까지 닷새 연속 1위를 찍었다. 이 영화는 1979년 12월12일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이 주도한 군사 쿠데타를 다룬다. 권력욕이 한 나라의 민주주의를 얼마나 퇴행시키는가를 통렬하게 알렸다. 특히 영화는 계엄이 멀게 느껴지는 MZ세대들에게, 이를 한발 앞서 학습하게 하는 효과를 줬다는 분석이 나온다. 《서울의 봄》과는 다른 결말이 나오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도 들린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영화 《택시운전사》 역시 역주행에 합류했다. 1980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와 택시운전사 김사복의 실화를 담은 이야기로 왓챠 '톱10 영화' 부문에서 깜짝 1위를 찍었다. 서비스 중인 다른 OTT에서도 순위는 가파르게 올랐다.
이 와중에 《택시운전사》에 출연한 독일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서 한국의 비상계엄 사태를 언급해 눈길을 끌었다. 토마스 크레취만은 5·18 당시 광주의 소식을 전 세계에 가장 먼저 알린 독일 ADR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피터)를 연기한 배우. 그는 인스타그램에 《택시운전사》 촬영 당시 찍은 세트장 사진을 올리며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택시운전사》는 한국의 과거를 다룬 영화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비극이 되풀이된 걸 안타까워하며, 12·3 비상계엄 사태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으로 풀이된다.
'호헌철폐, 독재타도!'로 상징되는 전두환 정권 말기를 그린 영화 《1987》에도 관심이 이어졌다. 박종철 열사로 시작해 이한열 열사로 끝맺는 영화다. 그사이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여러 인물의 이야기가 바통 터치하듯 릴레이로 이어진다. 역사를 바꾸는 건 한 명의 영웅이 아니라 다수의 민중임을 알리는 영화의 메시지는 2024년 여의도 광장에도 유효했다. 그 여진은 시민들이 모이고 있는 안국역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