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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마스터 다운 ㈉ 우주전함 야마토 2202 ㈉⌒ 26.reg936.top ■'스푸트니크 키드'였던 프레드 에스페나크는 고교 시절 경험한 생애 첫 일식에 반해 NASA 과학자가 된 뒤로도 내내 '일식 추격자'로 살았다. 그는 미 해군천문대가 발행해온 일식 정보지 사업이 예산이 끊겨 중단되자 개인 자격으로 그 바통을 이었고, NASA 은퇴 후에도 직접 출판사를 차려 그 일을 이어갔다. 미소 우주경쟁의 최전선에서 평생을 보내면서도, 행성 대기분석이라는 공적인 일과 병행해 장엄한 우주의 매력을 좇고 세상과 공유하고자 헌신했다. 그는 자칭 행복한 아마추어 천문학자였다. NASA 사진.
인간의 욕구에도 단계별 위계가 있어 동물적-생리적 욕구를 채우고 나면 안전-애정-인정 욕구를 거쳐 자아실현 욕구로 나아간다던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19 한국철도공사 43년 ‘욕구 5단계설’은, 돌이켜보면 인간 자체보다는 2차대전 전후의 ‘사회적 욕구’,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반영한 이론이었다. 자아실현의 고상한 욕구는 전쟁-인간(성)에 대한 환멸을 딛고 다시 서게 한 응원이자 일(노동)을 통한 재건-성장의 지침이었다.
사전적 의미의 자아실현, 즉 “잠재력을 깨워 더 나은 기량을 지닌 인간으로 대출이율계산기 성장”하는 건, 의지와 기회가 있다면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이 삶의 일부가 되는 것, 다시 말해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상이 포개지는 건 다른 문제다. 전자가 일(노동)의 결과(목표)에 얽매인 개념이라면 후자는 그 과정, 즉 일 자체에 연루돼 있는 개념이다. 전자가 전문적 직업적 영역에서의 세속적-사회적 성취라면 ibk환승론 , 후자는 아마추어적이고 주관적인 기쁨이나 보람의 의미에 가깝다. 자본주의 경쟁사회는 후자를 대체로 낮잡아 봐온 경향이 있다. 현대인의 만성적 우울과 불행감을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의 괴리에서 찾았던 불문학자 정명환('현대의 위기와 인간')의 진단도 유사한 의미일 것이다. 요컨대 일이 삶의 일부가 된다는 건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가 미쁘게 어깨 겯는 삶이다 대전아파트후순위대출 .
프레드 에스페나크(Fred Espenak)는 ‘미스터 이클립스(Mr. Eclipse)’ 라는 애칭으로 더 널리 알려진 미국 항공우주국((NASA) 고다드 우주비행센터 소속 과학자다. 낮에는 렌즈를 깎으며 돈을 벌고 밤이 돼서야 자신이 하고 싶던 철학을 했다는 스피노자처럼, 그는 반평생 직장에서 전파망원경과 적외선 분광기로 태양계 행성 인천신용보증재단대출 대기를 연구했지만 그가 정말 사랑한 건 일식, 즉 달이 태양을 온전히 가려 지구가 달그림자로 뒤덮이는 개기일식의 장엄한 순간이었다. 그는 다음 일식의 정확한 타이밍과 궤적을 계산하고, 기상학자 등과 함께 가장 좋은 관측 지점들을 찾아내 NASA 공식 회보와 온라인 게시판 등을 통해 세상에 알렸고, 혼자 또는 여럿이 팀을 이뤄 대륙을 넘나들며 일식을 보러 다녔다. 누가 시킨 일도, 돈을 벌자고 한 일도 아니었다. 행성 대기 관련 다수의 논문을 낸 NASA 과학자이면서 “내 직업적 삶을 관통하며(…) 열정적인 아마추어 천문학자로 살아왔”노라 자부한, 지난 세기의 가장 성실하고 미더운 '일식 추격자(Eclipse Chaser)' 프레드 에스페나크가 특발성 폐섬유증으로 별세했다. 향년 73세.
55년 전인 1970년 3월 7일 생애 첫 개기일식을 보러간 고교생 에스페나크. 그는 지난 3월 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저 사진을 올리며 "제 인생의 방향을 바꾼 사건이 일어난 날"이라고 썼다. 그리고 "다음 미국 대륙에서의 개기일식은 2045년 8월 12일"이라고 안내했다. Fred Espenak 페이스북
에스페나크는 1952년 공구 금형업자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의 외아들로 뉴욕주 애넌데일온허드슨(Annandale-on Hudson)에서 태어나 뉴욕 스태튼아일랜드에서 성장했다. 그는 8세 때인 1960년 여름방학에 롱아일랜드 할아버지 집에 놀러갔다가 이웃집 또래 아이의 망원경으로 달을 보고는 곧장 천체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곤 근 반년 아버지를 졸라 그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60mm 태스코 반사망원경을 받았다.
1957년 10월 구소련이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지구 저궤도에 올리면서 미국은 ‘스푸트니크 쇼크(Sputnik Shock)’에 빠져들었다. 코미디언 밥 호프의 농담 같은 위로- “그들(구소련)의 (2차대전) 독일 과학자들이 우리의 독일 과학자보다 더 영리했던 것일 뿐”-로 자위할 수 없는 위기감이었다. 연방정부는 이듬해 7월 NASA를 발족했고, 뿌리부터 바꿔야 한다며 청소년 과학교육 환경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당시 기준 미국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연방 과학교육지원법인 ‘국방교육법’에 서명했고, 의회는 10억 달러가 넘는 교육 예산을 승인했다. 청소년 과학박람회나 동아리 활동 지원에 안주하던 미국립과학재단(NSF)은 대학-초·중등학교를 연계한 기초 과학학습 연구지원 프로젝트들을 추진했고, 노벨상 수상자들까지 연구실을 떠나 전국 중·고교를 순회하며 강연했다. 심지어 맨해튼 프로젝트 과학자들도 초등학생들을 위한 ‘부엌 물리학(kitchen physics)’ 강좌를 개설했다. 1960년대 초 청소년들의 가장 인기 오락거리 중 하나가 로켓 모형 제작이었고, 웬만한 동네에선 천체망원경 하나쯤 없는 아이가 없을 정도였다. 에스페나크도 그렇게 ‘스푸트니크 키드’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망원경을 끼고 살았고, 거북이나 개구리, 화학 실험, 암석 수집, 현미경 관찰, 공룡, 전기회로, 개미 농장 등에도 관심을 쏟았다. 인기 청소년 천문 과학잡지인 ‘Sky & Telescope’를 교과서보다 열심히 읽었고, 잡지 광고에서 본 ‘8mm 뉴턴 반사망원경’에 홀딱 빠져 아버지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았다. 아버지가 비용 절반을 부담해준 덕에 구입한 그 망원경 값이 무려 625달러. 근년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6,000달러가 넘는 고가 장비였다.
1963년 7월 개기일식은 미국 알래스카에서 메인주를 가로지르는 경로로 전개됐지만, 북미 대부분 지역서도 부분 일식 관측은 가능했다. 11세의 에스페나크도 ‘애플’사 로고처럼 이지러진 태양을 보고는 단숨에 매료됐고, 관련 자료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미국서 관측할 수 있는 다음 개기 일식은 1970년이었다. 생애 단 한 번뿐일지 모를 그 우주쇼를 직접 보고야 말겠다고 결심한 그는 18세가 되자마자 운전면허증부터 땄다. 운전 경력 수개월의 초보운전자인 그는 어렵사리 부모를 설득해 가족 승용차를 빌려 3월 6일 새벽 5시에 스태튼아일랜드를 출발, 개기일식 관측 가능 경로 중 가장 가깝던 노스캐롤라이나까지 온종일 600마일(약 965km)을 달려갔다. 그리곤 다음날 정오 무렵 자신이 묵은 모텔 뒷마당에서 생애 첫 개기일식을 경험했다.
전근대인들을 종말의 공포로 사로잡곤 하던 그 ‘초자연적’인 현상을 두고 그는 “우주적인 소속감을 느꼈다”고, 훗날 뉴욕타임스 팟캐스트 ‘the daily’ 인터뷰에서 말했다. “내(우리)가 태양계 안의 그 경이로운 우주적 운동의 일부라는 깨달음”, 그리고 “지구와 달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3차원적 감각”을 공유하며 함께 있던 이들이 “마치 미식축구 홈팀이 터치다운에 성공한 것처럼 한마음으로 환호”하던 기억. 그는 거의 즉각적으로 “이 경험을 일생에 한 번만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애리조나대(천문학)에 진학했다가 한 학기만에 집에서 통학이 가능한 와그너 칼리지(물리학)로 편입했고, 오하이오주 털리도대에서 적색왜성 자기장 연구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부 시절인 1972년 7월엔 장장 1,200마일을 달려 캐나다 동부 퀘벡에서 일식을 기다렸지만 날씨가 흐려 개기일식의 장관은 보지 못했고, 이듬해 북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에선 거의 완벽한 개기일식과 황홀한 코로나(플라즈마 대기)를 경험했다. 이후 그는 평생 일삼아 일식을 쫓아다녔고, 그렇게 생애 통산 52차례의 일식(개기일식 31회)을 직접 대면했다.
천체물리학과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전공한 그는 NASA와 협업하던 한 소프트웨어 회사에 취업했다가 NASA의 국제 자외선탐사선(IUE) 망원경 조작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로로 메릴랜드 고다드 우주비행센터 적외선 천문학팀에 합류했다. 그의 주된 업무가 적외선 분광기를 이용한 심우주 전파-대기 분석이어서 분광기가 있는 애리조나 키트피크(Kitt Peak)와 하와이 마우아케아(Mauna Kea) 천문대가 그의 주요 일터가 됐다. 그는 토성의 바람, 목성 대기 속 에탄, 화성의 오존, 외행성계 탄화소수 등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공동)집필했다. 그곳들은 당연히 달-태양과도 훨씬 가까운 곳이었다.
에스페나크의 생애 주기는 일식 주기와 연동되다시피 했다. 그는 1995년 인도 개기일식 여행에서 8년 연상의 화학교사 패트리시아(왼쪽)를 만나 연인이 됐고 2006년 결혼해 해로했다. astropixels.com
개기일식은 태양의 1/400 크기인 달이 태양보다 400배가량 지구에서 가까운 궤도에 자리를 잡는 기막힌 우연 덕에, 선원근법상 지구의 소실점에서 보면 하나로 겹쳐질 수 있어서 생기는 현상이다. 다만 지구의 태양 공전 궤도면(황도)과 달의 지구 공전 궤도면(백도)이 약 5.9도 어긋난 탓에 태양과 달이 지구 중심과 일직선상에 놓이는 경우는 연중 한두 차례에 불과하고, 그나마 달의 본그림자(본영)가 지구상의 좁은 구간을 한정적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관측이 가능한 지역과 시간대도 극히 제한적이다. 더욱이 타원궤도를 도는 달이 지구와 멀어졌을 때는 시직경이 태양을 전부 가리지 못해 부분 일식으로 그치는 예가 더 많다. 개기일식을 보려면 정확한 타이밍에, 적절한 장소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당연히 날씨도 좋아야 한다.
엄밀히 말해 일식은 극소수 태양 플라즈마 연구자가 아닌 한 이제 천문 연구 대상이 아니고, NASA가 거들 일도 아니다. 미 해군천문대(USNO)가 1949년부터 시뮬레이션 등을 통해 예측하고 발간해온 일식 정보지 사업을 1994년 중단한 까닭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미국에만 수백만 명이라는 ‘엄브라파일(umbraphile, 달 본영 애호가)’들에겐 가장 정확하고 권위 있는 일식 예측 가이드를 잃게 된 셈이었다.
에스페나크는 친구인 캐나다 기상학자 제이 앤더슨(Jay Anderson)과 함께 NASA 당국을 설득, 최소한의 지원 약속을 받아낸 뒤 가욋일로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리곤 2009년 은퇴할 때까지, 다시 말해 2010년 일식 자료까지 13차례 일식 예측 회보를 발간하고 NASA 공식 일식 웹사이트를 운영했다. 전세계 방송사와 개인-단체 등이 일식 자료를 요청하면 초기에는 일일이 우편으로 이후엔 온라인으로 일식 자료를 제공했고, 은퇴 후에도 직접 출판사(Astropixels)를 차려 자비(自費)로 회보 발간 작업을 이어갔다.
에스페나크는 매해의 일식 장면을 촬영, 자신이 찍은 심우주 천체 사진들과 함께 NASA 홈페이지와 자신의 웹사이트(MrElipse.com, Astropoxels.com)에 올려 세상과 공유했다. 몽골 정부는 1997년 일식 과정을 담은 기념우표에 그의 사진을 썼고, 미국 우정국(USPS)도 2017년 일식 기념우표 사진으로 그의 아카이브를 이용했다. 가장 오랜 전통의 사진가 단체인 영국 왕립사진협회는 2018년 그에게 ‘과학적 이미지 어워드’를 수여했다.
그는 모든 개기일식은 저마다 고유하다고 말했다. 변화무쌍한 태양풍과 자기장 패턴에 따라 코로나의 형태와 움직임도 각기 달라, 마치 지문처럼 사진만 보고도 어느 해의 일식 장면인지 알아맞힐 정도였다고 한다. 1970년부터 거의 매년 일식을 쫓아다녔으니 청년기 이후의 그의 생애 주기도 일식 연감과 연동될 정도였다.
그는 1995년 인도 개기일식 현장에서 훗날의 아내인 패트리시아 토튼 에스페나크(Patricia Totten Espenak)를 만났다. 펜실베이니아 출신 화학교사였던 패트리시아도 1970년 개기일식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나섰다가 일행의 꼬드김에 넘어가 중도에 포기하는 바람에 90% 부분 일식을 보는 데 그친 이력이 있었다. 1972년 캐나다 일식 때도, 미래의 남편과 불과 5마일 남짓 떨어진 곳에서 흐린 날씨 탓에 일식을 놓치고 탄식했다. 패트리시아에겐 1995년의 개기일식이 25년 만의 첫 경험이었고, 너무 감격스러워 흐느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게 만난 둘은 1998년 연인으로 카리브해 개기일식 여행을 함께했다. 그리곤 2006년 직접 구운 태양과 달 관련 음악 시디를 배경음악 삼아 결혼식을 올렸고, 피로연에선 보니 타일러의 ‘Total Eclipse of the Heart’ 선율에 맞춰 춤을 추었다.
세상에서 가장 맑고 어두운 "100년 전의 밤하늘"을 간직하고 있다는 애리조나주 천문인 마을 '스카이 빌리지'에 지은 에스페나크 부부의 '비프로스트 천문대'. astropixels.com
2008년 NASA 은퇴를 앞두고 에스페나크는 벨기에 기상학자 잔 메이어스(Jean Meeus)와 함께 B.C 2000부터 A.D 3000년까지 전개됐고 또 전개될 1만1,898회(개기일식은 3,173회) 일식 정보를 집대성한 방대한 분량의 ‘5천년 일식 정전(Five Millennium Cannon of Solar Eclipses, 2006)’과 ‘5천년 월식 정전’(2009)을 발간했고, 아내와 함께 자신들의 일식 여행 에피소드와 관측 정보 및 요령 등을 정리한 ‘일식, 성공이냐 실패냐!(Total Eclipse or Bust!)’를 출간했다. 부부에겐 패트리시아가 전남편과 낳은 1남1녀가 있었다.
은퇴 후 에스페나크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맑고 어두운 밤하늘을 지녔다는 애리조나주 포털(Portal) 인근 오지 천문인 마을 ‘Sky Village’에 사설 천문대 ‘비프로스트 천문대(Bifrost Observatory)’를 짓고 정착했다. ‘비프로스트’는 노르드 신화에서 인간의 땅 ‘미드가르드(Midgard)’와 신들의 영역 ‘아스가르드(Asgard)’를 잇는 무지개다리 이름이다.
지난 4월 15일, 그는 일식 커뮤니티 식구들에게 짧은 메시지를 전송했다. 5년 전 진단받은 특발성 폐섬유증이 연초부터 급격히 악화해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불평할 마음은 없습니다. 저는 일식과 천문학, NASA의 일, 그리고 제 인생의 가장 큰 사랑인 팻과 놀라운 삶을 누렸으니까요. 그리고 일식을 쫓아다니며 얻은 수많은 친구들도 있죠. 남겨질 여러분은 더 오랜 세월 동안 더 많고 더 멋진 일식과 하늘의 경이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인간의 욕구에도 단계별 위계가 있어 동물적-생리적 욕구를 채우고 나면 안전-애정-인정 욕구를 거쳐 자아실현 욕구로 나아간다던 에이브러햄 매슬로의 19 한국철도공사 43년 ‘욕구 5단계설’은, 돌이켜보면 인간 자체보다는 2차대전 전후의 ‘사회적 욕구’,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를 충실히 반영한 이론이었다. 자아실현의 고상한 욕구는 전쟁-인간(성)에 대한 환멸을 딛고 다시 서게 한 응원이자 일(노동)을 통한 재건-성장의 지침이었다.
사전적 의미의 자아실현, 즉 “잠재력을 깨워 더 나은 기량을 지닌 인간으로 대출이율계산기 성장”하는 건, 의지와 기회가 있다면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일이 삶의 일부가 되는 것, 다시 말해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상이 포개지는 건 다른 문제다. 전자가 일(노동)의 결과(목표)에 얽매인 개념이라면 후자는 그 과정, 즉 일 자체에 연루돼 있는 개념이다. 전자가 전문적 직업적 영역에서의 세속적-사회적 성취라면 ibk환승론 , 후자는 아마추어적이고 주관적인 기쁨이나 보람의 의미에 가깝다. 자본주의 경쟁사회는 후자를 대체로 낮잡아 봐온 경향이 있다. 현대인의 만성적 우울과 불행감을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의 괴리에서 찾았던 불문학자 정명환('현대의 위기와 인간')의 진단도 유사한 의미일 것이다. 요컨대 일이 삶의 일부가 된다는 건 공적 자아와 사적 자아가 미쁘게 어깨 겯는 삶이다 대전아파트후순위대출 .
프레드 에스페나크(Fred Espenak)는 ‘미스터 이클립스(Mr. Eclipse)’ 라는 애칭으로 더 널리 알려진 미국 항공우주국((NASA) 고다드 우주비행센터 소속 과학자다. 낮에는 렌즈를 깎으며 돈을 벌고 밤이 돼서야 자신이 하고 싶던 철학을 했다는 스피노자처럼, 그는 반평생 직장에서 전파망원경과 적외선 분광기로 태양계 행성 인천신용보증재단대출 대기를 연구했지만 그가 정말 사랑한 건 일식, 즉 달이 태양을 온전히 가려 지구가 달그림자로 뒤덮이는 개기일식의 장엄한 순간이었다. 그는 다음 일식의 정확한 타이밍과 궤적을 계산하고, 기상학자 등과 함께 가장 좋은 관측 지점들을 찾아내 NASA 공식 회보와 온라인 게시판 등을 통해 세상에 알렸고, 혼자 또는 여럿이 팀을 이뤄 대륙을 넘나들며 일식을 보러 다녔다. 누가 시킨 일도, 돈을 벌자고 한 일도 아니었다. 행성 대기 관련 다수의 논문을 낸 NASA 과학자이면서 “내 직업적 삶을 관통하며(…) 열정적인 아마추어 천문학자로 살아왔”노라 자부한, 지난 세기의 가장 성실하고 미더운 '일식 추격자(Eclipse Chaser)' 프레드 에스페나크가 특발성 폐섬유증으로 별세했다. 향년 73세.
55년 전인 1970년 3월 7일 생애 첫 개기일식을 보러간 고교생 에스페나크. 그는 지난 3월 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저 사진을 올리며 "제 인생의 방향을 바꾼 사건이 일어난 날"이라고 썼다. 그리고 "다음 미국 대륙에서의 개기일식은 2045년 8월 12일"이라고 안내했다. Fred Espenak 페이스북
에스페나크는 1952년 공구 금형업자 아버지와 전업주부 어머니의 외아들로 뉴욕주 애넌데일온허드슨(Annandale-on Hudson)에서 태어나 뉴욕 스태튼아일랜드에서 성장했다. 그는 8세 때인 1960년 여름방학에 롱아일랜드 할아버지 집에 놀러갔다가 이웃집 또래 아이의 망원경으로 달을 보고는 곧장 천체와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곤 근 반년 아버지를 졸라 그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60mm 태스코 반사망원경을 받았다.
1957년 10월 구소련이 첫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지구 저궤도에 올리면서 미국은 ‘스푸트니크 쇼크(Sputnik Shock)’에 빠져들었다. 코미디언 밥 호프의 농담 같은 위로- “그들(구소련)의 (2차대전) 독일 과학자들이 우리의 독일 과학자보다 더 영리했던 것일 뿐”-로 자위할 수 없는 위기감이었다. 연방정부는 이듬해 7월 NASA를 발족했고, 뿌리부터 바꿔야 한다며 청소년 과학교육 환경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당시 기준 미국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연방 과학교육지원법인 ‘국방교육법’에 서명했고, 의회는 10억 달러가 넘는 교육 예산을 승인했다. 청소년 과학박람회나 동아리 활동 지원에 안주하던 미국립과학재단(NSF)은 대학-초·중등학교를 연계한 기초 과학학습 연구지원 프로젝트들을 추진했고, 노벨상 수상자들까지 연구실을 떠나 전국 중·고교를 순회하며 강연했다. 심지어 맨해튼 프로젝트 과학자들도 초등학생들을 위한 ‘부엌 물리학(kitchen physics)’ 강좌를 개설했다. 1960년대 초 청소년들의 가장 인기 오락거리 중 하나가 로켓 모형 제작이었고, 웬만한 동네에선 천체망원경 하나쯤 없는 아이가 없을 정도였다. 에스페나크도 그렇게 ‘스푸트니크 키드’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망원경을 끼고 살았고, 거북이나 개구리, 화학 실험, 암석 수집, 현미경 관찰, 공룡, 전기회로, 개미 농장 등에도 관심을 쏟았다. 인기 청소년 천문 과학잡지인 ‘Sky & Telescope’를 교과서보다 열심히 읽었고, 잡지 광고에서 본 ‘8mm 뉴턴 반사망원경’에 홀딱 빠져 아버지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모았다. 아버지가 비용 절반을 부담해준 덕에 구입한 그 망원경 값이 무려 625달러. 근년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6,000달러가 넘는 고가 장비였다.
1963년 7월 개기일식은 미국 알래스카에서 메인주를 가로지르는 경로로 전개됐지만, 북미 대부분 지역서도 부분 일식 관측은 가능했다. 11세의 에스페나크도 ‘애플’사 로고처럼 이지러진 태양을 보고는 단숨에 매료됐고, 관련 자료를 찾아 읽기 시작했다. 미국서 관측할 수 있는 다음 개기 일식은 1970년이었다. 생애 단 한 번뿐일지 모를 그 우주쇼를 직접 보고야 말겠다고 결심한 그는 18세가 되자마자 운전면허증부터 땄다. 운전 경력 수개월의 초보운전자인 그는 어렵사리 부모를 설득해 가족 승용차를 빌려 3월 6일 새벽 5시에 스태튼아일랜드를 출발, 개기일식 관측 가능 경로 중 가장 가깝던 노스캐롤라이나까지 온종일 600마일(약 965km)을 달려갔다. 그리곤 다음날 정오 무렵 자신이 묵은 모텔 뒷마당에서 생애 첫 개기일식을 경험했다.
전근대인들을 종말의 공포로 사로잡곤 하던 그 ‘초자연적’인 현상을 두고 그는 “우주적인 소속감을 느꼈다”고, 훗날 뉴욕타임스 팟캐스트 ‘the daily’ 인터뷰에서 말했다. “내(우리)가 태양계 안의 그 경이로운 우주적 운동의 일부라는 깨달음”, 그리고 “지구와 달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3차원적 감각”을 공유하며 함께 있던 이들이 “마치 미식축구 홈팀이 터치다운에 성공한 것처럼 한마음으로 환호”하던 기억. 그는 거의 즉각적으로 “이 경험을 일생에 한 번만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애리조나대(천문학)에 진학했다가 한 학기만에 집에서 통학이 가능한 와그너 칼리지(물리학)로 편입했고, 오하이오주 털리도대에서 적색왜성 자기장 연구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학부 시절인 1972년 7월엔 장장 1,200마일을 달려 캐나다 동부 퀘벡에서 일식을 기다렸지만 날씨가 흐려 개기일식의 장관은 보지 못했고, 이듬해 북아프리카 사하라 사막에선 거의 완벽한 개기일식과 황홀한 코로나(플라즈마 대기)를 경험했다. 이후 그는 평생 일삼아 일식을 쫓아다녔고, 그렇게 생애 통산 52차례의 일식(개기일식 31회)을 직접 대면했다.
천체물리학과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전공한 그는 NASA와 협업하던 한 소프트웨어 회사에 취업했다가 NASA의 국제 자외선탐사선(IUE) 망원경 조작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공로로 메릴랜드 고다드 우주비행센터 적외선 천문학팀에 합류했다. 그의 주된 업무가 적외선 분광기를 이용한 심우주 전파-대기 분석이어서 분광기가 있는 애리조나 키트피크(Kitt Peak)와 하와이 마우아케아(Mauna Kea) 천문대가 그의 주요 일터가 됐다. 그는 토성의 바람, 목성 대기 속 에탄, 화성의 오존, 외행성계 탄화소수 등에 관한 다수의 논문을 (공동)집필했다. 그곳들은 당연히 달-태양과도 훨씬 가까운 곳이었다.
에스페나크의 생애 주기는 일식 주기와 연동되다시피 했다. 그는 1995년 인도 개기일식 여행에서 8년 연상의 화학교사 패트리시아(왼쪽)를 만나 연인이 됐고 2006년 결혼해 해로했다. astropixels.com
개기일식은 태양의 1/400 크기인 달이 태양보다 400배가량 지구에서 가까운 궤도에 자리를 잡는 기막힌 우연 덕에, 선원근법상 지구의 소실점에서 보면 하나로 겹쳐질 수 있어서 생기는 현상이다. 다만 지구의 태양 공전 궤도면(황도)과 달의 지구 공전 궤도면(백도)이 약 5.9도 어긋난 탓에 태양과 달이 지구 중심과 일직선상에 놓이는 경우는 연중 한두 차례에 불과하고, 그나마 달의 본그림자(본영)가 지구상의 좁은 구간을 한정적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관측이 가능한 지역과 시간대도 극히 제한적이다. 더욱이 타원궤도를 도는 달이 지구와 멀어졌을 때는 시직경이 태양을 전부 가리지 못해 부분 일식으로 그치는 예가 더 많다. 개기일식을 보려면 정확한 타이밍에, 적절한 장소에서 미리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당연히 날씨도 좋아야 한다.
엄밀히 말해 일식은 극소수 태양 플라즈마 연구자가 아닌 한 이제 천문 연구 대상이 아니고, NASA가 거들 일도 아니다. 미 해군천문대(USNO)가 1949년부터 시뮬레이션 등을 통해 예측하고 발간해온 일식 정보지 사업을 1994년 중단한 까닭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미국에만 수백만 명이라는 ‘엄브라파일(umbraphile, 달 본영 애호가)’들에겐 가장 정확하고 권위 있는 일식 예측 가이드를 잃게 된 셈이었다.
에스페나크는 친구인 캐나다 기상학자 제이 앤더슨(Jay Anderson)과 함께 NASA 당국을 설득, 최소한의 지원 약속을 받아낸 뒤 가욋일로 그 바통을 이어받았다. 그리곤 2009년 은퇴할 때까지, 다시 말해 2010년 일식 자료까지 13차례 일식 예측 회보를 발간하고 NASA 공식 일식 웹사이트를 운영했다. 전세계 방송사와 개인-단체 등이 일식 자료를 요청하면 초기에는 일일이 우편으로 이후엔 온라인으로 일식 자료를 제공했고, 은퇴 후에도 직접 출판사(Astropixels)를 차려 자비(自費)로 회보 발간 작업을 이어갔다.
에스페나크는 매해의 일식 장면을 촬영, 자신이 찍은 심우주 천체 사진들과 함께 NASA 홈페이지와 자신의 웹사이트(MrElipse.com, Astropoxels.com)에 올려 세상과 공유했다. 몽골 정부는 1997년 일식 과정을 담은 기념우표에 그의 사진을 썼고, 미국 우정국(USPS)도 2017년 일식 기념우표 사진으로 그의 아카이브를 이용했다. 가장 오랜 전통의 사진가 단체인 영국 왕립사진협회는 2018년 그에게 ‘과학적 이미지 어워드’를 수여했다.
그는 모든 개기일식은 저마다 고유하다고 말했다. 변화무쌍한 태양풍과 자기장 패턴에 따라 코로나의 형태와 움직임도 각기 달라, 마치 지문처럼 사진만 보고도 어느 해의 일식 장면인지 알아맞힐 정도였다고 한다. 1970년부터 거의 매년 일식을 쫓아다녔으니 청년기 이후의 그의 생애 주기도 일식 연감과 연동될 정도였다.
그는 1995년 인도 개기일식 현장에서 훗날의 아내인 패트리시아 토튼 에스페나크(Patricia Totten Espenak)를 만났다. 펜실베이니아 출신 화학교사였던 패트리시아도 1970년 개기일식을 보기 위해 먼 길을 나섰다가 일행의 꼬드김에 넘어가 중도에 포기하는 바람에 90% 부분 일식을 보는 데 그친 이력이 있었다. 1972년 캐나다 일식 때도, 미래의 남편과 불과 5마일 남짓 떨어진 곳에서 흐린 날씨 탓에 일식을 놓치고 탄식했다. 패트리시아에겐 1995년의 개기일식이 25년 만의 첫 경험이었고, 너무 감격스러워 흐느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게 만난 둘은 1998년 연인으로 카리브해 개기일식 여행을 함께했다. 그리곤 2006년 직접 구운 태양과 달 관련 음악 시디를 배경음악 삼아 결혼식을 올렸고, 피로연에선 보니 타일러의 ‘Total Eclipse of the Heart’ 선율에 맞춰 춤을 추었다.
세상에서 가장 맑고 어두운 "100년 전의 밤하늘"을 간직하고 있다는 애리조나주 천문인 마을 '스카이 빌리지'에 지은 에스페나크 부부의 '비프로스트 천문대'. astropixels.com
2008년 NASA 은퇴를 앞두고 에스페나크는 벨기에 기상학자 잔 메이어스(Jean Meeus)와 함께 B.C 2000부터 A.D 3000년까지 전개됐고 또 전개될 1만1,898회(개기일식은 3,173회) 일식 정보를 집대성한 방대한 분량의 ‘5천년 일식 정전(Five Millennium Cannon of Solar Eclipses, 2006)’과 ‘5천년 월식 정전’(2009)을 발간했고, 아내와 함께 자신들의 일식 여행 에피소드와 관측 정보 및 요령 등을 정리한 ‘일식, 성공이냐 실패냐!(Total Eclipse or Bust!)’를 출간했다. 부부에겐 패트리시아가 전남편과 낳은 1남1녀가 있었다.
은퇴 후 에스페나크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맑고 어두운 밤하늘을 지녔다는 애리조나주 포털(Portal) 인근 오지 천문인 마을 ‘Sky Village’에 사설 천문대 ‘비프로스트 천문대(Bifrost Observatory)’를 짓고 정착했다. ‘비프로스트’는 노르드 신화에서 인간의 땅 ‘미드가르드(Midgard)’와 신들의 영역 ‘아스가르드(Asgard)’를 잇는 무지개다리 이름이다.
지난 4월 15일, 그는 일식 커뮤니티 식구들에게 짧은 메시지를 전송했다. 5년 전 진단받은 특발성 폐섬유증이 연초부터 급격히 악화해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게 됐다는 소식이었다. “하지만 불평할 마음은 없습니다. 저는 일식과 천문학, NASA의 일, 그리고 제 인생의 가장 큰 사랑인 팻과 놀라운 삶을 누렸으니까요. 그리고 일식을 쫓아다니며 얻은 수많은 친구들도 있죠. 남겨질 여러분은 더 오랜 세월 동안 더 많고 더 멋진 일식과 하늘의 경이를 경험하기를 바랍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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